지난 2022년 11월 OpenAI가 대화형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이하 AI) 챗지피티 (Chat GPT)를 공개한 이후 전 세계는 생성형 AI 열풍에 휩싸였다. 불과 1~2년 만에 AI의 언어 처리 능력은 인간의 예측을 뛰어넘을 정도로 발전했으며 파파고(Papago)와 딥엘(DeepL) 같은 번역 프로그램은 단순한 보조 도구를 넘어 전문적인 영역까지 넘보고 있다. 이러한 기술의 차원 도약은 지난 70년간 우리나라 외국어 교육의 요람으로 자리매김해 온 우리학교의 정체성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와 관련해 △생성형 AI와 번역의 현황 및 우리학교 학생들의 반응△위기의 원인과 문제점△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알아보자.
◆생성형 AI와 번역의 현황 및 우리학교 학생들의 반응
생성형 AI 기술의 발전은 번역의 새로운 패러다임(Paradigm)을 제시하고 있다. 과거의 기계 번역이 단어 대 단어의 치환에 가까워 어색한 직역 투를 벗어나지 못했다면 현재의 AI 번역은 방대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문맥을 파악하고 자연스러운 어조와 스타일까지 구사하는 단계까지 진화했다. 이로 인해 기업에서 진행되는 상당수의 정보 전달 목적의 텍스트 번역이 AI로 빠르게 대체되며 어문계열의 위기감은 그 어느 때보다 고조되고 있다.
이에 따라 학생들의 불안감은 실제 언어 관련 산업의 변화와 맞물려 더 증폭되고 있다. 시장 분석 기관 님지(Nimdzi)에 따르면 전 세계 언어 서비스 산업은 지속적으로 팽창하고 있지만 내부 구조는 급격히 변화하고 있다. 특히 기계 번역 시장은 연평균 13.5% 이상의 폭발적인 성장률을 보이며 단순 텍스트 번역 시장을 빠르게 대체하고 있다. 이에 발맞춰 AI 번역 결과물을 감수하고 수정하는 포스트에디팅(Post-Editing)*이 언어 산업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분야로 떠올랐으며 현지 문화에 맞게 콘텐츠를 변용하는 로컬라이제이션(Localization) 전문가 수요 또한 급증하는 추세다. 이는 곧 어문 전공자에게도 기본적인 기술 이해도 및 AI 협업 능력이 필수가 됐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현재 우리학교에서 진행 중인 교육이 산업의 변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할 것이란 우려로 인해 어문 계열 학생들은 전공 외의 진로를 탐색하는 실정이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은 외국어 교육이 중심인 우리학교 학생들에게 미래에 대한 직접적인 불안감으로 다가오고 있다. 실제로 외대학보가 우리학교 어문계열 학생들을 대상으로 지난 21일부터 25일까지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절반이 넘는 55.5%가 ‘생성형 AI가 미래에 인간 번역가나 전문가의 역할을 대체할 것’이란 점에 불안감을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불안감은 역량 개발에 대한 압박감으로 이어질 수 있는데 이 중 33.3%의 학생들은 ‘AI 기술 발전으로 인해 전공 외 다른 역량을 갖춰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낀다’고 밝혔다. 하지만 학생들의 위기감과 달리 학교 교육은 이같은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현재 학교의 전공 커리큘럼이 AI 시대에 필요한 역량을 길러주는 데 충분한가’란 질문에 응답자 전원이 부정적으로 응답해 교육 과정에 대한 불신이 심각한 수준임을 나타내고 있다. 다수의 학생이 전공 공부만으론 미래 경쟁력을 갖추기 어렵단 판단하에 코딩(Coding)이나 데이터 분석 등을 추가로 공부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위기의 원인과 문제점
AI 번역 기술의 대중화가 우리학교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가운데 가장 큰 문제점은 교육 시스템이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학교의 교과과정은 특정 언어와 문화권에 대한 깊이 있는 지역학 강의에 강점을 지니고 있으나 AI 및 언어공학과 결합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수업은 극히 제한적이다. 같은 어문계열 안에서도 학과별로 AI 교육 도입 수준에 극명한 차이가 나타나고 있다. 인도어과는 ‘AI 힌디어’란 과목을 통해 학생들이 AI 번역과 자신의 번역을 비교하는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또한 ELLT 학과는 이론 과목 언어 과목 부분에 영어 데이터 처리를 위한 프로그래밍과 언어공학개론 등을 개설했다. 그리스불가리아학과에선 △데이터 시각화 △AI 통번역 △VR 전시 기획 역량 강화 관련 강의를 개설한 바 있다. 하지만 다수의 소수어과(△루마니아△폴란드△헝가리학과 등)에선 AI 및 언어공학 관련 교과목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들 대부분의 전공과목은 전통적인 커리큘럼으로만 구성돼 있다. 이처럼 학과별로 발생하는 교육 격차는 많은 학생들이 디지털 언어 서비스 산업의 핵심 역량을 기를 수 있는 기회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있으며 이는 AI 시대에 언어 전공자들의 경쟁력 저하를 가속화할 가능성이 있다.
우리학교엔 컴퓨팅 사고와 같은 소프트웨어기초 교양 필수 과목이 존재하지만 이는 대부분의 어문계열 학생들에게 전공과 동떨어진 별개의 과목으로 여겨지고 있다. 소프트웨어 기초 교양 과목만으론 어문학적 지식을 데이터로 분석하거나 AI 모델을 활용해 지역학 자료를 연구하는 등 전공과의 유기적인 연계성이 부족해 시너지(Synergy)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더 큰 문제는 교육 현장의 보수적인 분위기다. 통번역이나 지역학 리포트 작성 과정에선 생성형 AI의 사용을 무조건적으로 금지하거나 부정적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만연하다. △AI를 비판적으로 수용하고△정확한 질문을 통해 원하는 결과물을 얻어내며△결과물의 오류를 판별하고 수정하는 능력을 길러주는 대신 AI의 사용 자체를 제한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이는 학생들이 AI 시대를 살아갈 필수 역량인 AI 리터러시(AI Literacy)를 키울 기회를 박탈하고 결과적으로 취업 시장의 변화에 무방비로 노출되게 만든다. 단순 번역 일자리가 AI가 초벌 번역한 결과물을 수정하는 포스트에디팅 업무로 대체되는 현실에서 AI 활용 능력을 갖추지 못한 졸업생들의 설 자리는 더욱 좁아질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나아가야 할 방향
AI 시대에 교육 현장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생성형 AI의 사용을 무조건적으로 금지하기보다 오히려 이를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을 가르쳐 하나의 학습 보조 도구로 자리 잡게 하는 것이다. △더 나은 결과물을 얻기 위한 질문법△윤리적인 범위 안에서의 기술 활용법△AI 생성 결과물 오류 분별법등과 같은 AI 리터러시 교육이 절실하다. 실제로 통번역대학원 차원에선 △기계번역 전문 강사 초빙△로컬라이제이션△컴퓨터보조번역 등 인공지능 시대에 맞는 융합 교육을 선도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위와 같은 노력이 단순히 대학원 수준에서 그치거나 단발적인 특강에 머물러선 안 된다. 모든 학부생이 전공 학습 과정에서 AI를 도구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체계적인 교과과정으로 뒷받침돼야 한다.
이미 국내외 여러 대학은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국내에선 서강대학교가 인문학적 상상력과 첨단 기술의 융합을 목표로 하는 아트앤테크놀로지(Art & Technology) 전공을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으며 중앙대학교 AI학과 역시 타 전공과의 연계를 통해 인문사회 분야의 AI 전문가 양성을 적극적으로 추진 중이다. 해외 사례론 미국의 카네기 멜런 대학교(Carnegie Mellon University, 이하 멜런대)는 언어 기술 연구소(Language Technologies Institute)를 중심으로 언어학과 컴퓨터 과학을 일찍부터 융합해왔다. 멜런대는 언어를 인문학 영역으로만 한정하기보다 분석 가능한 데이터이자 정교한 기술로 접근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에 발맞춰 우리 학교도 어문계열 학생들을 위한 디지털 인문학 연계전공이나 언어 데이터 과학과 같은 마이크로디그리(Micro Degree)를 활성화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AI 활용 지역학 자료 분석 또는 파이썬(Python)을 활용한 텍스트 마이닝(Text Mining) 등 전공과 직접적으로 연계된 실습 과목을 개설해 학생들이 기술을 자신의 핵심 역량으로 흡수하도록 도와야 한다. 나아가 언어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코딩 및 데이터 분석 능력을 함께 교육해나가며 컴퓨테이셔널 링귀스트(Computational Linguist)** 혹은 랭귀지 엔지니어(Language Engineer)***를 양성하는 학제 간 융합 교육 모델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한다.
이러한 교육 혁신에 대한 요구는 더 이상 학생들만의 목소리가 아니다. 학교 본부 차원에서도 변화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며 화답하고 있다. 미네르바대학 교양교육연구센터(이하 연구센터)는 “데이터 및 AI 관련 역량이 시대가 요구하는 필수 역량임을 인지하고 교양 교육 개편 과정에서 관련 교과목을 확대개편하고자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연구센터의 계획에 따르면 기존 소프트웨어기초영역에 AI와 데이터 관련 과목을 신설해 학생들의 선택권을 넓히는 한편 전공 기초 과목을 교양 학점으로 인정하는 코드쉐어(CodeShare) 방안까지 검토 중이다. 이는 전공 과목과 교양 과목의 벽을 허무는 의미 있는 첫걸음으로 모든 학생이 디지털 소양을 갖출 수 있는 기반이 될 것이다.
궁극적으로 우리 학교 어문계열 교육의 목표는 기술과 인문을 아우르는 융합인재 양성이 돼야 한다. 즉 교양 교육을 통해 얻은 기술적 토대 위에 각자의 전공 언어와 문화에 대한 독보적인 전문성을 결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데이터 분석△디지털 마케팅(Digital Marketing)△IT 기획 등 자신의 관심 분야 기술을 접목할 때 비로소 AI는 대체할 수 없는 독창적인 경쟁력이 완성된다. 우리학교가 AI 시대에 번역의 의미를 단순 언어 변환에서 문화와 기술을 잇는 가치 창출로 재정의하고 글로벌 리더의 위상을 지켜나가길 기대한다.
*포스트에디팅 (Post-editing): 기계 번역 결과물을 사람이 교정수정하여 품질을 높이는 과정
**컴퓨테이셔널 링귀스트 (Computational Linguist): 언어학 지식을 바탕으로 자연어처리(NLP, Natural Language Processing) 기술을 연구개발하는 전문가
***랭귀지 엔지니어 (Language Engineer): 언어 데이터를 다루고 소프트웨어애플리케이션에서 언어 기능을 구현개선하는 엔지니어
이해봄 기자 11haebom@huf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