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여행의 이유’를 읽고] 여행, 나를 잊기 위한 여정

등록일 2025년09월03일 16시50분 URL복사 기사스크랩 프린트하기 이메일문의 쪽지신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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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방학이 끝나고 학교에 다시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방학 중엔 어디론가 훌쩍 여행을 다녀온 학우들도 있을 것이다. 여행은 왜 우리를 설레게 할까? 김영하 작가의 산문집 <여행의 이유>는 그 질문에 대한 깊은 사유를 담고 있다.

 

작가는 먼저 ‘여행(travel)’이라는 단어의 어원부터 짚어본다. 놀랍게도 이 단어는 △고역△고통△노동을 의미하는 고대 프랑스어 ‘travail’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과거의 여행은 삶의 터전을 잃거나 공동체에서 추방당한 이들의 고된 여정이었고 종교적 순례처럼 숭고한 목적이 있더라도 그 과정은 험난하기만 했다. 그렇기에 여행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보상 즉 영생의 비밀이나 위대한 글감 같은 소중한 무언가를 얻어 돌아와야 한다는 관념이 있었다. 현재의 우리가 자처해서 떠나는 여행에서 기대하는 해방감이나 즐거움과는 거리가 멀다.

 

오늘날 우리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조금 다른 곳에 있는지도 모른다. 작가는 데이비드 실즈(David Shields)의 말을 인용하며 때론 여행이 “행복을 찾기 위해서가 아닌 자신들의 슬픔을 몽땅 흡수한 것처럼 보이는 물건들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필요하다고 말한다. 오래 살아온 집은 안식의 공간인 동시에 ‘상처의 쇼윈도’이기도 하다. 벽지의 얼룩처럼 지워지지 않는 기억과 가족에게 받은 상처들이 집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있다. 여행은 바로 이런 익숙한 고통으로부터 잠시 멀어지는 행위라는 것이다.

 

낯선 곳에 도착한 여행자는 필연적으로 ‘아무것도 아닌 자(Nobody)’가 된다. 나를 규정하던 △사회적 정체성△수많은 관계△책임감에서 벗어나 오직 △국적△나이△성별 같은 단순한 기호로만 존재하게 된다. 작가는 이것이 바로 여행의 본질일 수 있다고 말한다. 내가 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닌 내가 누구인지를 잊기 위해 잠시 떠나는 것.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벗어나 낯선 곳에서 먹고 잘 곳을 구하는 ‘현재’만이 중요한 순간을 마주하는 경험이 바로 여행이다.

 

모든 것을 잠시 내려놓는 여행의 끝은 어디일까? 작가는 오디세우스(Odysseus)의 여정을 통해 그 답을 암시한다. 온갖 모험 끝에 페넬로페(Penelope)의 침대로 돌아온 오디세우스에게 고통스러웠던 여행의 목적은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기 위함이었다. 여행을 통해 우리는 잠시 스스로를 비워내고 그렇게 확보한 공간을 다시 채우며 나아갈 힘을 얻는다. 여행은 더 이상 무언가 대단한 것을 얻어와야만 하는 고역이 아니다. 이번 방학에 여행을 다녀왔다면 어지러운 마음을 잠시 비워낸 것만으로도 그 여행은 충분한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윤고은 기자 10goeun@huf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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