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햄넷’을 보고] 고난의 바다에서 맞잡은 손

등록일 2026년04월01일 17시40분 URL복사 기사스크랩 프린트하기 이메일문의 쪽지신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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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햄넷(Hamnet)’은 매기 오패럴(Maggie O’Farrell)의 동명 베스트셀러 소설을 스크린에 옮긴 작품이다. 이 소설은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의 대표작 ‘햄릿(Hamlet)’의 제목에 얽힌 흥미로운 가설에서 출발한 팩션(Faction)*이다. 매기 오패럴은 셰익스피어에게 11살에 요절한 아들 ‘햄넷’이 있었고 아들의 사후 7년 뒤에 희곡 ‘햄릿’이 발표됐다는 역사적 사실에 주목했다. 이와 더불어 셰익스피어 전문 연구가 스티븐 그린블랫(Stephen Greenblatt)의 저서 속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 스트랫퍼드의 기록 문서에서 ‘햄넷’과 ‘햄릿’은 보통 혼용됐으며 사실상 같은 이름이다’라는 문장을 통해 두 이름 사이의 연관성을 발견하며 작품의 서사가 형성된다.  

 

영화는 셰익스피어의 시점으로 진행될 것이라는 일반적 예상과 달리 초반부를 그의 아내인 아녜스(Agnes)의 시점으로 끌고 간다. 아녜스는 숲과 자연을 사랑하고 식물을 이용한 치유 능력을 지닌 비범한 여인이다. 그녀는 가난한 라틴어 가정교사였던 셰익스피어와 사랑에 빠져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가정을 꾸려 △첫째 딸 수재나(Susanna)△이란성 쌍둥이 남매 햄넷△주디스(Judith)를 낳는다. 이후 셰익스피어가 자신의 꿈을 좇아 극단에서 일하기 위해 런던으로 떠난 사이 평화롭던 이들의 일상은 1596년 영국을 덮친 흑사병으로 인해 산산조각 난다. 11살이었던 햄넷은 사경을 헤매는 쌍둥이 여동생 주디스를 헌신적으로 돌보다 운명을 바꿔 동생 대신 목숨을 잃고 만다. 이후 아이를 잃은 부부는 각자의 방식으로 텅 빈 상실을 견뎌내기 시작한다.  

 

셰익스피어는 겉으로는 담담하게 슬픔을 억누르는 듯 보이지만 런던에서 연극을 준비하며 배우의 대사를 지도하는 과정에서 자기혐오와 절망에 몸부림치는 내면을 여실히 드러낸다. 비록 실제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있을 수 있으나 강가에 홀로 서 삶 자체에 대한 지독한 괴로움을 토해내는 독백 장면은 그의 비통함을 생생히 전한다. ‘죽음이라는 잠 속에서 어떤 꿈이 올지 그것이 우리를 주춤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오래 사는 재앙을 감내한다.’ 이 처절한 물음은 ‘삶은 곧 고통’이라는 불교적 통찰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한다. 우리가 삶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고통을 견디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죽음 이후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그의 독백은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남편이 죽은 아들의 이름을 상업적 연극으로 소비했다고 오해한 채 분노에 휩싸여 런던의 극장을 찾은 아녜스의 시선을 통해 완성된다. 처음에는 분노 속에서 무대를 바라보던 그녀는 점차 극의 서사에 깊이 빠져든다. 연극의 후반부 왕자가 독을 마시고 홀로 죽어가는 장면에서 아녜스가 무대를 향해 절박하게 손을 뻗자 주변의 관객들 역시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손을 내민다. 이 장면은 극장 안의 모든 이들이 함께 소년 ‘햄넷’의 죽음을 애도하는 하나의 의식처럼 다가오며 깊은 울림을 남긴다. 이 압도적인 순간은 예술이 이끌어내는 공감과 연대의 힘을 여실히 보여준다. 인문학과 예술이 실용성에 밀려 점차 그 가치가 축소되는 시대라지만 나는 여전히 예술이 지닌 고유한 힘을 믿는다.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느끼게 하고 인간의 마음을 깊은 곳에서 움직이는 힘. 영화 ‘햄넷’은 그것이야말로 가장 의미 있고 위대한 힘임을 조용하지만 강렬하게 전한다.

 

*팩션(Faction): 역사적 사실(Fact)에 상상력(Fiction)을 더해 재구성한 영화

 

 

이서영 기자 12seoyoung@huf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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